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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이나 항아리 따위에 붉은 화살과 푸른 화살을 던져 넣어 화살의 숫자로 승부를 가리는 전통놀이.
투호投壺는 궁궐과 양반 집안에서 주로 행해지던 놀이로 『예기禮記』에 투호법이 등장할 정도로 오래된 전통놀이이다. 본래는 중국 당나라 때에 성행되었던 것인데, 『북사北史』 백제전과 『신당서新唐書』 고구려전에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우리나라에도 일찍이 들어와 전승되어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고려 예종 때(1116년)의 기록을 보면, 그간 투호가 중단되었는데 장차 투호를 할 것이니 그림을 곁들인 교범을 편찬하라 명하고 있어 옛 전통으로서 투호놀이를 다시금 부활시키고 교범을 만들어 체계화시키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궁중의 연회나 고관들의 기로연耆老宴(노인효도잔치) 때 여흥으로 벌였다.
태종, 세종, 세조 등 조선의 왕들도 투호를 즐겼으며, 이중 가장 큰 관심을 가졌던 왕은 성종이다. 1478년(성종 9) 10월 27일 “투호를 왜 하지 않는가?” 물었다. 신하들이 “송대 사마광司馬光의 『투호보投壺譜』가 있습니다.” 하자, “투호는 희롱하고 노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는 기구라.” 일렀다. 그러나 신하들이 따르지 않았던 모양으로, 같은 해 11월 2일 승정원에 “투호는 장난이 아니므로, 재신宰臣이 모인 곳에서 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또 1482년(성종 13) 3월 11일 정승들에게 옛사람은 투호로 마음을 바르게 잡았다며, 장원자에게 망아지 한 마리를, 나머지에게 활 1틀씩 주었다. 이후 연산군, 중종, 명종 등 조선의 왕들이 투호를 즐겼고 경연을 벌여 상을 내렸다. 중종조 기사에 “종친 가운데 활을 못 쏘는 자는 투호를 시켰고, 세자도 투호를 즐겼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로 미루어 상무적인 훈련이자 놀이로서 활을 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즐기게 함으로써 활을 대체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투호는 넓은 마당의 잔디밭이나 대청에 귀가 달려 있는 항아리를 갖다놓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동서로 편을 갈라 10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화살을 던지는 놀이이다. 화살을 항아리나 귓구멍에 많이 넣은 편이 승리하게 되며, 무희들이 나와 한바탕 춤을 추어 흥을 돋우기도 한다. 살은 병 위 다섯 치 가량 되는 데서 반듯하게 떨어져 병 속이나 귓구멍 어느 쪽이든 가운데에 들어가게 한다. 이때 살을 던지는 이는 양쪽 어깨의 균형을 취해 어깨가 기울어지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 이기는 것을 현賢, 지는 것을 불승이라 하며, 점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헌배·벌배 등이 행해진다. 투호병은 입구의 지름이 5치·4치·2치이며, 귀의 크기나 종류도 여러 가지이다. 살은 청살과 홍살 2가지로 겨룬다. 남자들도 많이 놀았지만, 함부로 바깥출입을 할 수 없었던 양반 부녀자들이 집 안에서 많이 즐겼다.
사마광司馬光의 『투호격범投壺格範』에는 투호의 놀이기구에 대한 설명과 노는 법이 쓰여 있다. 즉, 투호 병은 입 지름이 세 치[寸]이고, 귀[耳]의 입 지름은 한 치이며 높이는 한 자[尺]이다. 병 속은 팥으로 채운다. 병은 던지는 이의 앉을 자리에서 두 살[矢] 반쯤 되는 거리에 놓고, 살은 열두 개를 사용하며 그 길이는 두 자 네 치이다. 실수하지 않고 병에 던져 꽂힌 것을 상上으로 삼는데, 먼저 120을 채우는 쪽이 이긴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날 그 놀이기구나 놀이 방법에 대하여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놀이 때 쓰는 병의 종류나 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며, 화살의 크기 또한 다양하다. 노는 법은 일정한 장소에 둔 투호 병을 향하여 일정한 위치에서 살을 던져 병 속이나 귀에 던져 넣는 것으로, 살이 꽂히는 데 따라 득점이 정해진다. 던지는 위치는 병에서 두 살 반, 즉 석 자 가량 떨어진 거리이며, 한 사람이 살 열두 개를 가지고 승패를 다툰다. 살은 병의 위로 다섯 치 가량 되는 데서 수직으로 떨어지게 한다. 투입법投入法에 유의할 점은 던지는 사람의 양쪽 어깨가 균형을 취할 것과 어깨가 기울어지지 않게 주의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기는 것을 ‘현賢’, 지는 것을 ‘불승不勝’이라 하며, 한번 던지는 것을 ‘일호一壺’라 한다. 그 점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 헌배獻盃(술잔을 바침)·벌배罰盃(벌주를 마심) 등이 행하여진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궁중에서 성행하였고, 양반들의 놀이였다. 따라서 놀이할 때 예禮를 갖추었는데, 일반 백성들은 놀이 도구를 마련하는 일이며 절차가 복잡하여 하지 못했다. 오늘날에는 우리 놀이가 새롭게 조명되면서 고궁에서나 명절의 행사로 누구나 쉽게 해 볼 수 있는 놀이가 되었다. 각 지역의 박물관이나 유적지, 축제장 등에 조성된 민속놀이 공간에서 빠지지 않는 종목이 되었고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놀이로 자리잡은 상황이다.
이 놀이는 천 원 권 지폐에 실릴 정도로 대표적인 민속놀이이다. 과거에는 양반들의 놀이였으나 오늘날에는 누구나 하는 놀이가 되었다. 주로 명절에 고궁이나 민속촌 등지에서 쉽게 할 수 있고, 교과서에 실려 체육시간에 함으로써 이제 보편적인 놀이가 되었다. 던지는 지점을 잘 포착해야 하기 때문에 판단력과 집중력이 길러지고, 마구 던지는 것이 아니라 인내심을 가지고 차분히 한 개씩 던지는 가운데 인내력과 끈기가 길러지게 된다. 또한 과거에는 특별하게 제작된 투호통을 이용하였으나, 요즘은 항아리나 플라스틱 통을 이용하기도 한다. 가장 대중적인 전통놀이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는 만큼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