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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쏘기의 기술이나 실력을 겨루기 위한 모임. 활쏘기가 활에 화살을 걸어 쏘아 목표물을 맞히는 행위라면, 활쏘기대회는 활쏘기에 참가한 개인 또는 단체의 사람들이 실력을 겨루어 우열을 가리기 위한 경기이다. 일정한 경기 규칙 아래 궁술대회가 시행된다는 점에서 활쏘기대회는 전통 놀이의 하나이다. 궁술회(弓術會)라고도 부른다.
활쏘기대회는 그 유래가 꽤 오래다. 일설에는 중국 고대에 대사례(大射禮)라는 활쏘기대회에서 과녁[口]에 맞춘 화살을 기록하는 사람[人]을 글자로 만든 것이 ‘사(史)’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활쏘기대회도 역시 오래 되었다. 고구려가 매년 3월 3일에 낙랑의 언덕에 모여 사냥을 했다는 것으로 보아, 활쏘기대회가 사냥대회와 함께 발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백제는 비류왕 때 사대(射臺)를 만들어 매월 초하루에 습사(習射)를 하였고, 신라는 매년 8월 15일에 활쏘기를 하여 포상하였다. 고려도 또한 활쏘기를 통해 무예를 권장하고 이를 인재를 선발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활쏘기대회는 삼국 이래 거의 국가 주도로 이루어졌다. 민간에서 활쏘기대회가 성행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이다. 유교사회였던 조선왕조는 육례(六禮) 가운데 하나인 활쏘기를 선비들에게 장려하는 한편, 국왕이 대사례(大射禮)를 실시하고 지방에는 향사례(鄕射禮)를 시행하였다. 태종 때부터는 활쏘기 연마를 위해 궁궐 안에 사정(射亭)을 처음 설치하는 한편, 도성 내에는 사청(射廳)을 두었다. 또한 무과를 비롯한 각종 무관 시험에서 활쏘기를 크게 강조하였다. 특히 무과에서 활쏘기가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민간에서의 활쏘기대회가 성행하는 배경이 되었다.
16세기부터는 유교 이념이 확산되면서 춘추로 향사례를 시행하는 과정 속에 향사당(鄕射堂)이 전국에 설치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향사당 이외에 새로이 민간 사정이 등장하였다. 이중화의 『조선의 궁술』에 따르면, 선조 때 경복궁 동쪽에 오운정(五雲亭)을 지어 일반인에게 개방하니 이것이 민간 사정의 시작이라고도 한다. 그로부터 서울과 지방에 점차 많은 사정이 생기기 시작하여 전국에 확산되었다. 그리하여 민간사정을 중심으로 편사라고 불리는 활쏘기대회가 성행하였다. 무예 연마와 심신 수련을 위한 활쏘기대회가 총포의 등장으로 점차 여가 수단으로 발전해 나갔다.
그리하여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따르면, 매년 3월에는 서울과 지방의 무사와 동리 사람들이 모여 과녁을 펼쳐 걸고 편을 나누어 활쏘기대회를 열어 승부를 겨루었다. 아울러 9월에도 역시 활쏘기를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19세기에 이르러 춘추로 서울과 지방에서 활쏘기대회가 하나의 세시풍속으로 정착하는 바탕이 되었다.
근대 이후에는 편사 중심의 활쏘기대회를 활성화시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1909년 최초의 사설 궁술 단체인 사궁회(射弓會)가 조직되었는가 하면, 1922년에는 조선궁술연구회(1926년 조선궁술회로 개칭)가 창립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1932년부터는 제1회 전조선궁술대회가 열렸으며, 이로써 새로이 전국 규모의 활쏘기대회가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해방 후 조선궁도협회(1948년 대한궁도협회 개칭)가 설치되어 활쏘기대회를 주관하는가 하면, 서양의 활인 양궁이 보급되면서 국궁대회와 양궁 대회로 나뉘어 발전해 왔다. 한편, 1994년 서울 정도(定都) 6백년을 기념하여 황학정(黃鶴亭)에서 장안편사(長安便射)를 복원하여 현재 매년 시행하고 있다.
활쏘기는 우리 민족의 역사 발전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발달해왔다. 일찍이 한민족의 장기로 부각된 활쏘기는 고구려에 이르러 동북아 최고의 궁술로 발전하였다. 그 전통을 이은 조선의 활은 임진왜란 때에도 한중일 삼국의 무예 가운데 가장 높이 평가받았다. 오늘날 국궁(國弓)이라 불리는 활쏘기는 한국의 대표적인 무예 가운데 하나이다.
한국에서 궁술이 발달한 배경은 각궁(角弓), 편전(片箭) 같은 성능 좋은 활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찍부터 국가와 민간 주도의 활쏘기대회가 발달했기 때문이다. 수렵을 겸한 군사 활동으로 출발한 활쏘기대회는 이후 무예 연마와 함께 심신 수련의 수단으로 성행하다가 민간의 여가 활동으로 정착되었다. 특히 조선 후기부터 시작한 편사는 서울과 각 지방의 활터인 사정을 중심으로 발전하여 오늘날까지 활쏘기대회의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활쏘기대회의 특징을 이룬다.
또한 민간의 사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편사는 한국의 활쏘기 문화가 대중화하고 스포츠화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이점은 서양의 근대 스포츠가 클럽 중심으로 발전한 것과 비교할 때 주목되는 점이다. 봄과 가을로 시행한 편사는 향사례의 시행 시기(3월 3일, 9월 9일)와 일치한다. 결국 조선시대의 활쏘기대회가 유교 덕목의 실천을 기반으로 대중화되었다는 점에서 문화사적 특색을 지닌다.